최치원문학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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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치원의 생애

최치원문학관

"지혜로운 자는 가난해도 즐거워하고 어리석은 자는 부자라도 걱정한다"

- 고운 최치원 -



고운 최치원 (崔致遠, 857년 ~ 908년 이후)

12세에 떠난 당나라 유학길

헌안왕 원년에 서라벌 사량부에 태어난 최치원은 6두품이라는 신라 신분제도의 한계를 넘고자 12세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. 최치원의 아버지 '견일'은 "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아버지로 생각하지 마라. 나도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겠다."고 했을 만큼 당시 신분적 한계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.

과거급제와 쌍녀분전설

최치원은 인백기천(人百己千, 남이 백번에 능통하면 나는 천번을 한다.)의 정신으로 6년 만에 빈공진사과에 급제하고 율수현 현위로 제직했다. 당시에 최치원이 유람지인 율수현 남쪽 초현관에 머물던 중 무덤의 사연을 듣고, 시를 지어 위로하자 꿈에 두 여인이 나타나 각기 답가를 주고 사랑을 나눴다는 ‘쌍녀분 전설’이 전해진다.

격황소서를 써 세상을 놀라게 하다

황소의 난(875~884)으로 당나라 정국이 불안한 시절,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휘하에 들어가 도통순관직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. 그때 황소를 토벌하자는 격황소서를 써 보냈는데,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두려움에 그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. 그 공으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의 직함과 자금어대까지 하사받았다.

신라로 돌아와 [계원필경]을 올리다

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헌강왕에게 귀국 때까지 공사[公私]로 쓴 글을 편집한 [계원필경]을 올렸다. 총20권에 달하는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으로, 당의 관리 임용 제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. 이후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를 제수 받았다.

[시무10여조]로 개혁을 꾀하다

최치원은 골품제와 혼란이 가중된 신라를 개혁하고자 894년 진성여왕에게 [시무10여조]를 올리고 6두품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. 그러나 진골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태산군(전북 정읍), 부성군(충남 서산, 893), 천령군(경남 함양) 태수 등 지방관을 전전하다 관직에서 물러났다.

고운사와의 인연

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하던 최치원은 의성의 고운사에 잠시 머물렀다. 이때 최치원은 고운사에 머물면서 여지, 여사 두 대사와 가운루(駕雲縷), 우화루(羽花樓)를 지었다. 이 후 고운사는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따 외로울 고(孤), 구름 운(雲)의 고운사(孤雲寺)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.


주소 :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241 /
TEL 054-834-8200 / FAX 054-834-8399 /
이메일 goun241@naver.com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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